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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제안

오간 이야기

이기는 제안

AWS 제안 매니저 박지훈 님이 하려는 말은 하나였습니다. TITO, Trash In Trash Out. 부실한 정보를 넣으면 부실한 제안서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안팀은 RFP에 적힌 내용만 압니다. 그런데 RFP는 명문화된 문서라 고객의 진짜 속내가 담기지 않습니다. 공개된 정보는 전체의 20에서 30퍼센트뿐이고 나머지 70에서 80퍼센트는 직접 가서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업팀이 필드에 있어야 하고 영업 대표가 수집해오지 못한 니즈는 제안서에 단 한 줄도 담기지 못합니다.

수집해야 할 정보에는 뼈대가 있습니다. 우선 이 솔루션이 고객에게 주는 경제적 가치를 구체적 수치로 증명해야 합니다. 가격이 들어가면 고객은 그보다 큰 가치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RFP에 쓰이지 않은 진짜 고민, 즉 숨겨진 니즈를 파악해야 하고 예산을 쥔 최종 의사결정자가 누구인지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이 셋이 없으면 제안은 뜬구름이 됩니다.

반대로 실패를 부르는 죽음의 삼각형도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 고객의 페인 포인트 분석이 부족해지고 고객 혜택 대신 공급자 기준의 기능만 나열하고 정작 고객이 알고 싶은 정보는 빠집니다. 제안서는 거의 언제나 승자독식이라 차별화가 전부이고 윈팀 설계의 원칙은 입증된 핵심 아이디어를 결합하고 정량적 근거로 백업하고 경쟁사를 무력화하는 핫 버튼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경쟁사 무력화는 그들의 강점을 이 프로젝트에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죽이는 것이라 고스팅이라 부릅니다. 핫 버튼은 고객이 먼저 보여주지 않으니 정보 수집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고객의 페인 포인트는 누구나 이해할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AI 시대엔 모두가 AI를 쓰니 제안서가 다 비슷해지기 때문에, 프로세스를 재창조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클라이원트 조준호 대표님은 결론부터 꺼냈습니다. AI 시대에도 이기는 제안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변하는 건 복잡한 프로세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때는 우리 제품도 나 자신도 결국 AI에게 먹히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AI에게 먹히지 않는 사업이 아니라 AI 때문에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사업은 무엇인가로 질문을 뒤집었더니 답이 보였습니다. 초등학생 아들도 AI로 게임을 수십 개 만드는 시대라 AI를 잘 쓰는 것은 이제 변별력이 아니고 프로페셔널은 AI로 사업 자체를 재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한 고백도 나왔습니다. 올해 초 전사에 AI를 도입하고 목요일 오후를 실험 시간으로 떼어냈지만 AI 스킬이 늘어도 회사가 성장하진 않았습니다. 사업을 재설계해야 성장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 맥락에서 공공 입찰의 전 과정을 AI가 지원하는 Contrl을 소개했습니다. 7년 치 입찰 데이터에서 제안 요청서와 과업 지시서를 전부 추출해 두었기에, 담당자 검색부터 입찰 분석과 숨은 니즈, 제출 서류 목록까지 한 번에 나옵니다.

그가 짚은 건 제안 전략의 스윗 스팟이었습니다. 고객의 니즈와 우리의 강점이 겹치면서 경쟁사는 없는 지점인데, RFP 내부 정보는 누구나 보니 윈팀을 만들려면 RFP 밖의 정보를 넣어야 합니다. 국내 B2B SaaS 시장은 최대 2조 원이지만 공공 입찰 시장은 200조 원입니다. 툴을 파는 대신 고객과 함께 그 200조 시장에 들어가겠다고 방향을 바꾸자 파이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싱가포르 사례였습니다. 가장 비싼 입찰가였는데도, 발표 전 현장에 가보니 화장실 벽에 꺼진 디스플레이가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어 이거 저희가 연결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고객이 감동해 가장 비싼 옵션을 골랐습니다. AI가 만들어줄 수 없는 마지막 1퍼센트였습니다.

LG유플러스 윤상명 님은 스스로를 국가대표 발표 선수라 소개했습니다. 두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저자이자, 지방에서 33년을 살다 서울말을 새로 배운 사람이라 발표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는 산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한마디는 Trash in, Jewel out이었습니다. 같은 정보를 줘도 누가 어떤 아웃풋을 내느냐는 인간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회의 중 팀원이 AI에 한 번 물으면 전 세계 정보가 다 오니 리더가 모든 정답을 내려줄 수 없고 그래서 AI 시대일수록 대면 발표가 더 중요해집니다. 리포트를 없애고 발표로 평가를 대체하는 교수가 나오고 자소서는 AI로 상향 평준화됐지만 면접에서 그 수준이 안 나오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책임도 사람에게 있습니다. 자율주행이 기술 완성에도 상용화가 더딘 건 사고 책임 소재 때문인데, AI가 쓴 문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짚었습니다. 발표 중 몇 초의 침묵으로 공기를 바꾸는 분위기, 손동작과 아이컨택 같은 비언어입니다. 정면에서 흰자위가 보이는 동물은 인간뿐이라 어디를 보는지가 곧 눈치라고 했습니다. 설득에는 공식이 있어서 OREO는 하버드에서 검증된 논리 설득 공식이고 STAR는 상황을 구조적으로 풀 때 유효한데, 내용보다 구조가 전달력을 결정합니다. VUCA도 인간의 언어로 다시 뒤집었습니다. Vision, Understanding, Clarity, Agile. 마지막 무기로는 유머를 꼽으면서 유머가 곧 휴먼이며 AI 시대일수록 손글씨 같은 아날로그 휴먼 터치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세 연사가 함께한 파이어사이드챗에서는 실무 감각이 오갔습니다. 핫 버튼을 어떻게 찾느냐는 질문에 윤상명 님은 고객의 고객을 보라고 했습니다. 신한은행에 제안한다면 신한은행의 고객이 얼마나 만족할지를 끝까지 말해야 하고 그 언어는 이미 고객사 홈페이지의 중장기 전략 보고서와 IR 자료, 경영진 인터뷰에 있습니다. 공공이라면 국민 편익, 주민 만족도로 언어가 달라집니다.

한국과 해외의 입찰 문화 차이도 나왔습니다. 한국은 PPT로 제출하고 발표로 심사받는 반면, 호주와 싱가포르는 엑셀로 제출하고 백 개 넘는 질문 대부분이 구체적 기술과 보안 항목입니다. AI 덕에 언어 장벽은 크게 문제가 안 되지만 나라마다 일하는 방식이 달라, 언어보다 일하는 방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암묵지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조준호 대표님은 퇴사 3년이 지나도 전 직장에서 그 제안서 어디 있냐는 전화를 받는다며 파일은 남아도 맥락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과물만이 아니라 과정의 맥락까지 지식 베이스에 남겨야 합니다. 히든 니즈는 고객을 미리 만나야만 알 수 있고 AI는 그 과정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만날 담당자와 던질 질문을 찾아줍니다.

AI 시대에 나는 영업과 제안을 어떻게 다르게 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열 개 조가 토론했습니다. 공통으로 나온 말은 AI가 만들어주는 건 70점짜리 제안서이고 마지막 30점은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발표자가 그 제안에 얼마나 녹아 있느냐가 결과를 가르고 검토자의 역량이 더 중요해졌으며 저연차도 AI가 있으면 고연차처럼 영업할 수 있다는 조직 구조의 변화도 언급됐습니다. 마지막 발표자의 말이 이날의 마무리로 남았습니다. 입찰과 수주에 정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이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우리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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