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민원이 1시간 반 만에 앱이 됐습니다
오간 이야기

이번 행사의 주제 Taste Is All You Need는 AI가 코드를 빠르고 쉽게 짜 주는 시대일수록 만드는 사람의 취향이 중요해진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서로의 고민을 먼저 듣고 그 문제를 직접 풀어 보는 시간으로 하루를 짰습니다. 민원은 누가 쓸 것인지,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무엇이 있으면 좋겠는지 세 줄이면 충분하다고 안내했습니다. 예로 든 것은 매주 반복되는데 아무도 자동화하지 않은 업무, 아이디어는 오래됐지만 첫 화면을 끝내 못 만든 사이드 프로젝트, 스프레드시트로 버티고 있는 모임 운영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진행을 맡은 김준수 님은 굳이 민원을 받은 이유를 고객에서 찾았습니다. 민원이 있다는 건 결국 고객이 있다는 것이고, 내가 만들기만 하면 쓸 사람이 이미 존재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날 온 사람들은 코드를 직접 쓰지 않더라도 자기 문제와 만들고 싶은 것이 분명한 분들이고, 혼자 AI를 붙잡고 백날 고민해 봐야 답은 생각보다 한정적으로 나오니 남의 문제를 들으며 최대한 질문하고 대화하라고 했습니다. 민원이 없을 만큼 평화롭게 사는 분이라면 다른 사람의 민원을 대신 풀면서 개발 실력을 연습하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평일 반나절을 통째로 비운 것도 김준수 님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주말에 혼자 시간을 잡아 하려고 하면 인간의 의지가 나약해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 평일에 사람들을 한데 모아 두면 훨씬 몰입할 수 있으리라 본 것입니다. 프리랜서와 대학생, 취업 준비생에게는 평일 낮이 가장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고, 직장인에게는 연차를 하루 쓸 만한 자리가 되길 바랐습니다. 만든 결과물을 각자의 사업이나 포트폴리오에 바로 쓸 수 있게 하자는 것도 처음부터 세운 목표였습니다.
조는 무작위로 짰지만 네트워킹에만 썼고, 만드는 건 각자 혼자 하는 개인전이었습니다. 30분에서 40분 동안 지금 하는 일을 소개하고 요즘 겪는 불편이나 오늘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을 나눈 뒤 그걸 어떻게 만들지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대화하는 동안 녹음을 켜 두라는 팁도 나왔는데, 말로 나누다 보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데다 그 녹음을 그대로 AI에게 먹이면 개발이 훨씬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공지와 결과물 링크는 전부 디스코드 민원센터 채널에 모았습니다.
참가자 모두가 쓴 Lovable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작한 AI 앱 빌더로, 만들고 싶은 것을 말로 설명하면 화면과 기능을 갖춘 웹 앱을 만들어 주고 다 만든 앱은 lovable.app 주소로 바로 공개할 수 있습니다. 출시 8개월 만에 연간 반복 매출 1억 달러를 넘겨 가장 빠르게 성장한 소프트웨어 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참가자 전원이 크레딧 100개씩을 받아 오후 2시부터 3시 반까지 만들었고, 30개 가운데 29개가 그 자리에서 공개됐습니다. 같은 날 야외에서는 테이스티성수 W.W.C.D 치맥파티가 열려, 만들다 쉬고 싶은 사람은 맥주 한잔을 하러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쉼표」는 서울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를 위한 웰니스 플래너로, 일정 사이의 빈 시간을 찾아 맞는 장소나 휴식을 제안하고 다음 일정 전에 챙길 준비물까지 알려 주면서 현재 위치는 수집하지 않는다고 첫 화면에서 밝혀 둡니다. 할 일 하나를 끝낼 때마다 밤하늘에 별이 켜지고 모두 끝내면 숨겨진 별자리가 나타나는 「Star by Star」, 원하는 삶을 AI와 함께 구체화한 뒤 오늘 무엇을 할지 정해 주는 AI 비서실장 「Today」도 나왔습니다. 「종교대통합 처방전」은 지금의 마음을 고르고 속마음을 300자 안으로 적으면 성경과 불교, 철학 세 전통의 시선을 한 통의 편지처럼 묶어 처방해 줍니다.
「마이에우」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뜻하는 마이에우티케에서 이름을 땄습니다. 만든 분은 AI로 모두의 생산성은 올라가는데 그 과정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능력은 줄고 내 생각의 기록도 파편화돼 흩어지는 것 같다는 데서 출발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대신 써 주지 않고 약한 논리와 빈틈에 빨간 펜만 그은 뒤 고쳐 쓰는 일은 사람에게 맡기는, 남보다 먼저 내 논리의 빈틈을 찾아 주는 10분짜리 반론 상대를 자처합니다. 기획서의 맹점을 상사나 고객보다 먼저 찾아보거나 자기소개서를 내 생각으로 고쳐 쓰는 데 써 보라는 것이 이 앱의 제안입니다.
「이거 사기여?」는 문자만 오면 사기냐고 묻는 엄마를 위해 만든 서비스입니다. 문자나 카톡, 유튜브와 뉴스 캡처를 올리면 AI가 수상한 부분과 대처 방법을 알려 주고, 입력칸을 길게 누르면 붙여넣기가 나온다는 안내나 비밀번호와 인증번호는 가리고 올려 달라는 당부처럼 화면 곳곳에 부모님 세대를 생각한 문장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아이 기질 육아」는 그날의 상황과 아이의 반응을 기록할수록 기질 프로필을 고쳐 나가고, 「엄마가좋아아빠가좋아」는 육아를 두고 엄마 아빠의 생각이 부딪힐 때 누가 옳은지보다 우리 가족에게 맞는 방법을 찾도록 오늘 해 볼 작은 합의를 제안합니다.
「집으로」는 공공데이터포털에 구조동물 조회 OpenAPI가 있다는 걸 알고 만든 서비스로, 전국 보호소의 공고를 한곳에서 보여 주며 많은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그대로 이름이 됐습니다. 「모두의 막차」는 분위기를 깰까 봐 조금만 더 있다가 막차를 놓쳐 본 사람들을 위해, 일행이 한 링크로 들어와 각자 막차 시간을 넣으면 1차 해산까지 남은 시간을 테이블 위에서 녹아내리는 촛불로 보여 줍니다.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미안해하지 않게 하려는 앱입니다. 깨끗한 화장실을 찾아 주는 지도와 비 오는 날 근처 실내 명소를 추천하는 지도, 여행에서 누구에게 카메라를 맡길지 가려 주는 사진 실력 테스트도 나왔습니다.
「수주각」은 외주 개발자와 스튜디오가 고객을 찾으려고 위시켓과 정부지원사업, 오픈카톡을 매일 돌아다니는 문제에서 출발해, 그날 올라온 위시켓과 K-스타트업 공고 가운데 내 회사와 기술 스택에 맞는 것만 골라 주고 공고마다 경쟁자 수까지 보여 줍니다. 수수료 없이 큐레이션만 하니 플랫폼이 떼던 20%를 고객과 개발자가 나눠 갖는 구조입니다. 「설득랩」은 기획서나 GitHub 주소를 올리면 빠진 숫자와 사실부터 되묻고 CEO나 CFO, 정보보호 책임자처럼 상대마다 설득 전략과 예상 질의응답을 써 주며, 「RoleFit」은 채용 공고와의 적합도를 분석하되 이력서에 없는 경력은 만들어 내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못 박아 두었습니다.
「결」은 행사 전 디스코드 민원센터 채널에 올라온 진정성 있는 만남 앱이라는 민원에서 시작했습니다. 사진과 조건으로 빠르게 판단하는 대신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을 먼저 알아 가는 만남 서비스로, 연락과 다툼, 주말, 관계의 속도에 관한 네 가지 질문으로 내 연애 스타일을 정리하고 하루에 두 명만 소개합니다. 매칭 전에는 프로필 사진이 보이지 않고 대화를 나눌수록 흐림이 조금씩 옅어지지만 끝까지 완전히 선명해지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남긴 민원을 다른 사람이 받아 1시간 반 만에 제품으로 만든 셈이라 이번 민원센터가 하려던 일이 그대로 담겼습니다. 펍지 성수에서 열린 행사답게 배틀그라운드 보급품 상자를 열면 랜덤 벌칙이 나오는 「보급품 상자 뽑기」도 나왔습니다.
30개 결과물은 오후 2시 39분부터 4시 47분 사이에 디스코드 민원센터 채널에 하나씩 올라왔고, 오후 4시부터는 함께 보는 시연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위를 매기거나 상을 주지 않는 공유회였는데도 「결」을 만든 분은 써 보고 싶은 사람은 하트를 눌러 달라고 남겼고, 단어 20개로 과신형인지 겸손형인지 알려 주는 메타인지 테스트에는 어떤 문제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복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붙었습니다. 민원을 낸 사람은 당장 써 볼 것이 생기고 만든 사람은 쓸 사람이 정해진 채로 고쳐 나갈 수 있으니, 써 볼 만한 것은 행사 뒤에도 계속 고쳐 진짜로 쓰이는 AI 제품으로 키워 가는 것이 이 민원센터의 다음 단계입니다.
현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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